눈에 보이는 선 혹은 그것의 배면에 기록된 존재에 관하여

나혜령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는 작업에서는 상당히 추상적이고 단순화된 드로잉 이미지들이 특징적으로 눈에 들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매우 간결한 배경 화면에 몇 개의 선들이 선명한 유채색의 굵은 실선의 모양을 한 상태에서 직선과 곡선으로 변주되기도 하다가 간혹 실타래처럼 엉켜있는 불안정한 상태의 선으로 변화를 거듭하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배경 화면 역시 매우 간결해 보이지만 자세히 관찰해 보면 여러 겹의 페인팅 아래로 명확히 알기 어려운 밑색이 은은하게 올라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작가는 드로잉적인 선들이 화면을 장악하고 있는 이 미묘한 추상적 작업에 대해 ‘In.visible’이라는 이름으로 지칭하고 있다. ‘보이는’(visible)이라는 것과 ‘보이지 않는’(‘Invisible’)이라는 것 혹은 ‘보이는 것 안에’(in visible) 등의 다른 다양한 의미로도 읽힐 수 있도록 알파벳 배열을 위치시켜 양가적이거나 다층적인 의미가 표출되도록 한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함으로써 맥락과 상관없이 선입견에 의해 의미가 규정되거나 어떤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되지 않도록 모호성 가운데 위치시키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모호성은 나혜령 작가의 작업 전반에서 드러나 있는 특징적 요소이면서 작가의 사유 방식을 엿 볼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나혜령 작가의 작업에는 ‘보이는’(visible) 것, 혹은 ‘보이지 않는’(‘Invisible’) 것에 대한 문제뿐만 아니라 ‘의식’과 ‘무의식’, ‘말로 할 수 있는 것’과 ‘말로 할 수 없는 것’,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 등, 살아 존재한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작가의 철학적이고 심리적인 다양한 문제의식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개인사적 트라우마가 있었고 이를 작업을 통해 해소하는 과정에서 시작된 삶에 대한 통찰이 이와 같은 문제의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의 삶에 대해 구체적인 무엇을 이야기 하기 보다는 이 모호성을 통해 결국 삶이란 것, 즉 살아서 존재하고 사유하며 이를 의식하고 있는 것이란 이 양가성, 혹은 다층성의 양상을 띨 수 밖에 없다는 작가의 시각만을 담담히 캔버스에 기록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작가가 이처럼 단순해 보이는 선들만을 캔버스 위에 남겨 두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혹은 존재를 의식 영역에 대해서만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배면에 있을 수 있는 무의식의 영역을 가시 세계 내로 끌어 올려 비가시적 영역에 감춰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과 함께 그것의 그림자라도 기록될 수 있게 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읽혀진다. 존재한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이란 겉으로 드러나 있는 것으로만 확인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배면에 감춰져 있는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양가적이거나 다층적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구조를 드러내고자 하는 작가의 사유방식이며 동시에 어떤 강렬한 외침이나 설득력 있는 웅변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간결하지만 명료한 존재의 지표를 캔버스라는 가시 영역 내에 구축해 내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된 작업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인간은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 가는 창조적 존재라는 것이다. 나혜령 작가의 작업에는 바로 그 존재의 의미에 대한 명확한 표시들이 선의 진행과정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움직임의 모습과 그것의 흔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때 그 선들의 의미를 읽어내는 일이란 모호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 선들에는 작가의 호흡과 정신이 분명하게 각인되어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승훈 (미술비평)